전쟁사 이야기 53편 - 공세와 수세
오랫만입니다 여러분 (소재가 떨어져간다)
혹시 여러분 영화 '한산' 재밌게 보셨나요? 전 제가 여태껏 해온 게임 중, '월드오브워쉽'이라는 게임에 제일 오랜 시간 집중하고 투자해왔습니다. 당연히 현질도 많이 했고, 그 덕에 이번 달 초에 한산 상영회에 초대를 해주더군요.
한산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명량보다 긴장감은 낮았지만(1 vs 333은 아니었으니까), 각 군의 내부 갈등(이순신과 대립하는 원균, 가토와 대립하는 와키자카)도 흥미로운 포인트였습니다. 또한 적이 최대한 접근했을 때를 노려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포격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훈련도와 용기가 필요한 점이었죠.
과거에 제가 재밌게 보았던 '남한산성'에서는 적 기병이 몰려오는 와중에 조선 포수가 조총을 최대한 참은 후에 적이 근접했을 때 발사해야 하는데, 너무 멀리 있을때 미리 발포하는 바람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해버리는 장면이 있었죠.
당신은 이런 순간, 땅이 울리고 적이 우루루 몰려오는 때 적이 최대한 접근할 때 까지 무기를 발포하지 않을 용기와 침착함이 있습니까?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429
영화에 등장한 거북선이나 판옥선 또한 여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함선은 2층 구조로 2층에 전투병과 노를 젓는 인원이 같이 있었는가? 아니면 2층에서 노를 젓고, 3층에 화포와 사수가 있었는가? 판옥선을 개량한 거북선은 과연 2층 구조인가, 아니면 3층 구조인가? 거북선은 상부를 완전히 철판으로 덧데어 만든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가? 거북선에 달렸다는 용두(용머리)는 과연 낮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나, 아니면 배 위로 솟구쳐 올라와 있었는가? 등이요.
영화에서는 우선 설득력 있는 설을 위주로 체택하였습니다. 판옥선이 2층 구조일 경우 노를 젓는 인원과 전투병이 뒤엉켜서 큰 문제가 생긴다는 점, 따라서 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거북선 또한 이미 이순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하던 무기인데, 아쉽게도 우리는 거북선의 정확한 모습을 알 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기존의 판옥선 위에다가 지붕만 얹은 3층 구조와, 나대용이 특별히 개량해서 만든 2층 거북선을 모두 등장시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등장한 거북선이 거의 아이언맨 수준으로 돌격하면서 부딪히는 왜군을 족족 박살낸다거나(당연히 물리적으로 한번 부딪히는 순간 거북선 또한 고속으로 직진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차량이 사람을 치면 빠르게 달려가지 못하고 속도를 순간적으로 잃는 것처럼), 그렇게 명중하지 못하던 조선 수군 화포가 유독 거북선에서 발사한 화포는 쏘는 족족 왜선을 맞춰버리며 괴물처럼 등장한다던지. 뭐 영화적 허용으로 이해해 줍시다.
제가 한산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게 공감한 부분은, 바로 '공세와 수세'에 대한 논쟁과 전략 수립입니다. 간단한 단어인데, 공세는 곧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 수세는 방어를 해야하는 세력이 자연스레 하게 되는 전략입니다. 예컨데 제가 여태 연재한 태평양 전쟁에서, 1941년 기습적으로 미국의 주력 전함을 파괴한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중기까지 줄곧 '공세적'이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진주만을 기습하고 나서 필리핀, 웨이크 섬 등 태평양의 미군 거점들을 모조리 공격하였죠.
당연히 방어를 해야 하는 입장은 미국이며, 수세적입니다. 주력이라 여겼던 전함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함부로 대등한 공격을 해서 남은 항공모함과 해군까지 잃어버리면 캘리포니아까지 일본군이 쳐들어 올 지도 모릅니다. 다행히도 미군은 본인들의 산업, 공업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오랫동안 벌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세와 수세는 한순간에 바뀌기도 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6척 중 4척을 잃으면서 확고한 공세력을 잃어버리고, 미 해군은 조금씩 더욱 더 공격적인 수세에 들어갑니다. 끝없는 소모전 끝에 일본군의 공업력의 한계로 함선 건조가 느려지고, 보급선이 중간에 격침됨에 따라 태평양 각지의 섬에서 육군마저 밀리면서 점점 수세의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저 노란색 부분이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와 영해를 확보했던 시기입니다(다만 지도가 좀 불분명하네요 특히 중국 쪽이) 일본의 공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당시 태평양에서 감히 일본 해군을 막아낼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소수의 영국 해군은 전쟁이 터지는 순간 박살났고, 프랑스 또한 독일에 넘어갔기에 태평양에 투자할 여력이 되질 않았었죠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manwali&logNo=220318208906
그런데 이 공세와 수세라는 개념은 참으로 미묘하면서도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공세적인 방어도 있을 수 있고, 수세적인 공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당장 영화 '한산'에서도 용인전투가 언급됩니다. 일본군은 부산에 입성하자마자 근처를 초토화시키면서 매우 빠르게 한양으로 달렸습니다. 조선 왕을 잡으면 조선 땅은 전부 당연히 복속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웬걸 선조는 이미 빤스런을 친 상태였고, 왕이 빤스런 쳤는데 조선군이나 의병은 무너지지 않고 전라도 지역에서 북상해옵니다.
있는 병력 없는 병력 싹 다 긁어모아서 올라온 5만의 조선군은 당시 일본군이 이미 먼저 점령한 성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한산에서는 와키자카가 오히려 성을 포기하고 뛰쳐나와서 유격전을 펼치다가 조선군이 방심한 사이에 공격해서 군대를 박살냈다고 하죠. 용인전투는 한국사 중에서도 졸전에 속하지만, 다행히도 병력에 큰 피해가 없이 단지 편제가 무너진 것 뿐이라 이때 참전한 권율 장군도 휘하 병력을 이끌고 잘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수세를 해야 하는(소수의 병력으로 성을 지켜야 하는) 와키자카는 성을 포기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와서, 조선군을 와해시킴으로서 결국에는 수성에 성공했다" 라고요. 이렇듯 수세와 공세는 양면의 동전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과거 고구려 - 수나라 전쟁에서도 수나라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해서 초반에 기를 죽여놓은 사례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태평양 전쟁 중, 각 군의 함대 방어 전략에서도 이런 '공세적' 개념과 '수세적'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먼저 일본군의 경우, 함대가 공격을 받을 경우 체계적인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냥 각자 함선이 최대한 이리저리 기동하면서, '알아서' 회피해야 했습니다. 이때 문제가 뭐였냐면, 일본군은 미군보다 더 열악한 대공 방어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사격통제장치가 구식이었기 때문이죠. 상상해보십시오, 저~~어기 가늠도 안되는 거리와 방향에서 수많은 비행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대공포탄은 빛의 속도가 아닌 일정한 속력을 가지며 동시에 거리가 멀어지면 운동에너지를 잃고 낙하해버립니다.
효율적인 대공방어를 위해서는 적 전투기가 오는 방향과 고도를 정확히 파악한 뒤, 대공포탄의 속도를 고려하여 미리 탄막을 적절한 곳에 뿜어대야 합니다. 이 계산을 사격통제장치가 하는데, 이는 곧 대공포의 갯수보다도 성능이 뛰어난 사격통제장치가 얼마나 많이 달려있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당연히 미군은 이것보다 더 많은 사격통제장치를 달고 있었죠.
이 2가지가 겹쳐서 미드웨이해전에서 참사가 일어납니다. 항공모함은 당대 전함에 버금가는 매우 크고 무거운 배였으며 함 내에는 함재기와 그에 필요한 연료, 각종 무기류를 가득 채운 움직이는 비행장입니다. 마치 자동차도 크기가 작은 자동차는 유턴 시에 매우 짧은 거리를 돌지만, 상대적으로 큰 버스나 화물차는 더 넓게 돌아야 하는 것처럼, 항공모함도 체급이 작은 구축함보다 선회에 걸리는 시간도, 선회하는 동안 이동하는 거리도 길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은 공격을 받을 때는 '엄청나게 수세적인'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죠.
미 해군의 공격을 받자 거대한 항공모함이 허겁지겁 선회하면서 폭탄을 피하는 모습. 당연히 이런 거대한 표적이 굼뜨게 움직이면서 완벽하게 회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딱 5분 동안 주력 항공모함 3척이 골로 가버립니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imkcs0425&logNo=60155741283&categoryNo=55&parentCategoryNo=0&viewDate=¤tPage=4&postListTopCurrentPage=1&from=postView
그러나 미 함대는 일본과 전혀 다른 방식의 대공 방어 전략을 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보다 뛰어났습니다. 일본 함선의 경우에는 적 함재기가 공격을 해서 무장이 없거나, 혹은 격추해야지 안전을 담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무장을 탑재한 함재기가 계속 날아다니기만 하면서 신경을 끌기만 해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함선을 방어하기 위해 선회를 하면 항공갑판에서 비행기를 띄우는 것도 큰 지장을 받습니다.
반면 미 함대는 이렇게 항공모함이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상황에서도, '공세적'인 방어를 합니다. 중간에 항공모함을 두고, 그 주위로 둥글게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호위하면서 항공모함을 향해 달려오는 적 항공기를 조기에 섬멸하여 항공모함이 직접 둔중한 몸을 움직이게 할 필요가 없게끔 하였습니다(물론 모든 함재기를 막은 것도 아니고, 여기를 뚫고 간 일본 함재기가 미 항공모함에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미 함대의 원형진. 적 항공기가 접근할 경우 함대 전체가 지휘에 따라 대공포를 발사하여 접근하는 항공기를 미리 제거하여 항공모함을 방어한다는 개념을 짯습니다. 굉장히 견고한 형태의 방어진으로, 현대의 미 항공모함 전대도 여기에 추가적으로 핵잠수함과 보급함이 추가되어 항공모함을 안전하게 호위합니다.
https://blog.naver.com/imkcs0425/60154778190
함대가 적 항공기에게 공격당하는 '수세적'인 상황에서 마치 질질 끌려가듯이, 항공모함이 회피기동을 하기 보다는 조기에 적 항공기를 격추시킴으로써 '수세적인 상황에서 공세적인 방어 전략'을 짭니다.
이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도 사격통제장치의 발전과 더불어 강력한 중앙통제식 지휘에 맞물려 매우 효과적인 방어 전략이 됩니다. 미 해군은 기술적으로도 일본군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전략적으로도 더 뛰어났습니다. 현대의 함대도 이렇게 작은 함선들이 떨어져서 적의 접근을 경고하거나 격추시키고,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초계기는 저 멀리 시야가 닿지 않는 곳까지 레이더로 적을 탐색합니다. 해저에서는 핵잠수함이 항공모함을 노리는 적 잠수함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분량 조절에 또 실패했는데요, 저는 한산에서 '와키자카는 수성을 하지 않고도 수성에 성공한 셈이지요' 라는 대사를 보자마자 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약간 스포일러지만, 한산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비록 수세적인 입장에 처해있었지만 웅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바다에 나가서 적을 요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도 적이 사다리로 올라타기 전에 학익진을 갖추고 함포를 쏘아서 적이 판옥선에 공격하기 전에 섬멸해버리죠. 정말로 바다 위에 성을 쌓아서 적이 성에 올라오기 전에 쓸어버립니다.
이렇듯 몇 백년이나 떨어진 전쟁사 사례에서 '공세적인 수성전, 방어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역시 전쟁사는 우리에게 지혜를 깨우쳐줍니다. 저는 그런 매력 덕분에 빠르게 질리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전쟁사를 흥미진진하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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