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같지도않은소리마라 [1299488] · MS 2024 · 쪽지

2024-11-13 22: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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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찬우 EBS작두 현대시 감상 한번씩 읽어보고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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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끄적여 봤습니다.


<그릇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심찬우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들은 분이라면 아시겠지요. '알고 보니 아픈 곳이 나의 중심이었다' 는 것을요.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중심을 찾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깨진 그릇에 비유되는 칼처럼 날카로운,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벗어난 힘이야말로 자신의 중심을 찾아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제와 균형에서 빗나간 칼날은 '맹목의 사랑' 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성을 잃고 적절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랑을 노리고 있지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칼날은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해 준다고 화자는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런 칼날에 상처가 나기 쉬운 맨발이 지금 자신이라고, 자신은 베어지기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칼날이 자신을 베어 주기를 원합니다. 칼날뿐만이 아니라,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어떤 것이든 자신을 베는 칼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죠. 이 칼날이 자신을 벰으로서 더 성숙해지기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에게는 혼의 성숙이, 나의 중심을 찾게 해 주는 '아픈 곳' 이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가을 떡갈나무 숲>


떡갈나무 숲을 걷는다. 떡갈나무 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 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

그 눈부신 날갯짓 소리 들릴 듯한데,

텃새만 남아

산 아래 콩밭에 뿌려 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 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 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 같다.


떡갈나무 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짐승이 혀로 핥아 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산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 거야, 잎을 떨군다.


==


잎이 떨어진 가을, 화자는 떡갈나무 숲에서 걷고 있습니다. 잎이 떨어져 동물들의 이불이 되어 주고, 집이 되어 주는 것을 생각합니다. 나무는 동물들과 연대 유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면 분명, 동물들이 나무 근처에서 알콩달콩 노닐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화자는 지나간 봄과 여름을 상상해 봅니다. 풍뎅이들이 날아다니고, 노루도 노닐었을 것이라 상상하죠. 하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가을이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나 봅니다. 하늘을 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니, 내가 공기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마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하늘이 되어, 떡갈나무 숲 위에서 반짝이는 별이 될 것 같이 느껴집니다. 화자도 떡갈나무와, 산속 동물들과 연대, 유대, 조화를 나누고 싶어합니다. 떡갈나무가 동물들과 알콩달콩 놀던 시절을 상상하니 이러한 내면이 더욱 심화됩니다.


하늘을 보고 난 뒤, 고개를 든 채 시선을 하늘에서 떡갈나무의 나뭇가지로 돌려 남은 열매 하나를 바라봅니다. 혀로 핥아 보고 뒤에 오는 자식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화로운 세상을 상상합니다. 결핍은 심화됩니다.


그래서인지, 하늘을 보며 성찰을 하고 난 뒤 화자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중얼거립니다. 봄과 여름에 나무와 동물들이 이루던 조화를 상상하고, 내가 하늘의 별이 되어 정말 이 숲과 교감하는 것을 상상하니 내면이 심화된 탓이겠지요. 화자는 구성원들끼리 연대 유대 조화하는 세상을 지향합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러자 떡갈나무는 잎을 떨굽니다. 자신의 마지막 손이라고, 뺨에 대 보라고 하며 화자를 위로합니다. 화자는 위로를 받고 싶어합니다. 


각박한 현실세계의 일상 속 소소한 인연으로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일까요. 실제로 그렇게 위로를 받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시일까요. 연대 유대 조화가 가득한 세상이 다가오기를 소망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면 시를 벗어나는 감상이지만,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시입니다.


<과목>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고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


모든 것이 꺼져가는 가을이라는 계절과 비바람을 이겨내고 황홀한 빛깔의, 무게의 은총인 과물을 무르익은 과목을 보며 화자는 경악합니다. 나쁜 의미의 경악이 아닙니다. 되려 감탄하며 경외를 표현하고 있지요. 화자는 그러한 과목의 태도를 지향하고 있나 봅니다. 정말 눈의 시력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역경을 이겨내고 과물을 메단 과목의 숭고함을,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봄으로서 일상에서 무뎌지고 나빠졌던 '마음의 시력' 을 다시금 '회복' 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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