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오늘날의 청문회
노무현과 오늘날의 청문회
“저는 힘도 없고 아마 회장님 같은 분과는 밖에서는 감히 만나뵙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런 때 아니면 제가 또 언제 회장님에게 이런 말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질문하고자 합니다. 드릴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나는 노무현이 말을 잘한다는 데엔 동의하지만 그가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말엔 동의하지 못한다. 메시지는 멋있어도 그걸 전달하는 언어가 세련되지 못해서다. 사람이라 표현하면 될걸 인간이라 표현해서 괜히 구설을 만드는 그에게, 링컨의 게티스버그연설과 같은 아주 세련되게 시작하는 명연설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투박한, 일상에서 쓰이는 모난 놈, 잘 좀 살아보자 따위의 단어들이 송곳처럼 날아들어 위선된 권력자의 폐부를 찌를 때 우리는 깊이 공감한다. 청문회 시작할 때 했던 저 말에도 나는 깊이 공감이 됐다. 그들은 만나기 어려우니까. 그들 자신이 권력을 사유화하여 성을 쌓았고 일반인은 기껏해야 스펙을 쌓아 그 성 문지기나 되기 위해 입사할 밖에.
자기를 먼저 버리고 상대에게 칼을 겨누는 그였기에 나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고 응원했으며, 통쾌했다. 그게 노무현의 힘이다. 있어보이려면 얼마든지 있어 보일 수 있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이지만 그는 언제나 탈권위, 없는 사람임을 온몸으로 웅변했다. 그게 통한다. 노무현이 질문할 때 고매한 지식인도 시정잡배 양아치도 동화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전경련 탈퇴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회장들 여기 손들어보세요”
얼마 전 있던 청문회에서 의원 하태경과 안민석은 재벌들을 상대로 고함을 지르며 야단을 쳤고 대중은 환호했다. 권력이 내놓으라 해서 어쩔 수 없이 내놓았다고 당연하듯 얘기하는 재벌들이 일개 의원에게 쩔쩔매는 게 보기 좋았지만 그게 통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불편했다.
하태경과 안민석, 그리고 의원들은 국민이 되어 질문하지 않았고 재벌의 상전이 되어 질문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의 윽박과 쇼맨십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지 국민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정말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침착하게 따져 물은 다른 의원들의 질의는 묻혔다. 국민이 되어 을로서 질문하여 칼끝을 겨눴던 노무현과 달리 상전이 되어 강자로서 “이리오너라!”고 외친 그들 덕에 재벌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고 누군가는 여기서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입을 모은다. 제도 우습게 보고 마구 힘을 휘두르는 그들이 불쌍해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전략의 실패였다고 사회학자 카이솔로는 지적했다.
재벌 청문회로 뭔가 얻어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재벌에 대한 관대한 국민여론을 일깨울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정치권력 박근혜는 이미 기반을 사실상 상실했지만 우리나라 경제권력은 그대로다. 재벌의 역할을 긍정했던 사람은 지금도 긍정하고, 부정했던 사람은 지금도 부정한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언론에게도 아쉽다. 언론은 자극적이고 큰소리 낸 의원에게 스팟라잇을 안겨다주었다. 한 사회의 정의가 어떠한 행위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프로세스라면 언론의 정의는 응당 주어져야 할 스팟라잇을 합당한 이에게 안겨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얌전하게 질의한 의원들에게는 그 어떤 스팟라잇도 주어지지 못했다. 큰소리치고 호통만 친, 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의원들은 예능도 나오시고 썰전도 나오시고 종회무진 활약중이다.
유튜브로 청문회영상을 보니 ‘핵사이다 하태경, 안민석 송곳질문에 이재용 쩔쩔 따위’의 말같지도 않은 캐치프레이즈가 내 폐부를 후벼판다. 노무현의 청문회에는 핵사이다, 송곳질문 따위의 가벼운 워딩이 어울리지 않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진솔했고 우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이 둘의 차이다.
오늘날 청문회는 노무현 오디션이 되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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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직접 쓰신건가요?